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기타 === 명량 해전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 오익창은 명량 해전 직전 피난민들과 사대부들에게 공문을 돌려 이순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문신이다. 오익창은 물자를 이순신 함대에 지원하고, 자신의 호소에 응답한 사람들을 모아서 군량과 무기를 운송하면서, 피난용 어선들로 적 교란용 위장선 병력을 만들어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이 전적을 인정받아 전후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에 의하면, 이순신이 왜군과 싸울 때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개발되는 [[면제배갑]]이 떠오르는 장면이긴 한데, 솜이불을 뱃전에 걸어봐야 어차피 조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은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 구경을 늘린 오오즈츠,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나 간신히 약간의 타격을 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리고 실제 역사는 그보다 더 적었다. 물론 총탄에 직접 맞지 않더라도 파편에 의한 피해는 막을 수 없기에 솜이불이나 가죽 판으로 둘러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따라서 3층 상갑판에서 아래로 이불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만약 일본군의 입장에선 이불이 걸려있는 조선군의 배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고, 더욱이 현장 지휘관인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의구심을 품게 한다.[*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과장된 기록이 남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박의 일종)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또 이순신의 [[http://comic.mt.co.kr/comicView.htm?cid=87&cno=9793&cpg=2&nPage=2|어릴 적 일화]]가 떠오르는 장면. 즉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